3. 왜 호주 선교부인가 경남 선교의 뿌리는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이었다. 왜 영국 사람들이 조선 선교에 그렇게 목을 매었을까. 은둔의 땅, 서양인 입국을 거부했던 당시 상황에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런데도 저들이 조선을 위해 헌신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저들을 통하여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 성경책 두 권을 전하고 참수당하므로 실패한 선교사로 볼 수밖에 없었던 토마스 선교사, 경남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음에도 도착 하루 만에 숨진 데이비스 선교사는 각각 실패한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도구로 쓰임 받은 「한 알의 밀알」이었다. 존 로스의 조선 선교 열정의 동기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였고, 그의 열정 때문에 선교사도 없는 조선에 먼저 조선글 성경을 번역하고 이를 들여보냈다. 한글이 성경을 만남으로, 조선 5백 년의 혼돈에서 불과 1백 년 만에 열방이 주목하는 선진국이 되도록 만든 분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죽음과 헌신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토마스는 당시 자기를 죽인 관리인 박 춘권과 어린아이에게 각각 한문 성경 1권씩 주었다. 박 춘권은 호기심으로 성경을 보다가 그 후 선교사의 입국이 허용되면서 생긴 「안문 교회」의 집사로 교회를 섬겼다. 그의 조카 또한 삼촌 집에서 성경책을 보다가 믿음을 갖게 되어, 고려문을 찾아가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 세례받고, 성경 번역 작업을 돕게 된다. 또 한 권의 성경은 12세였던 최 치량에게 전한 성경책이다. 그는 책을 받은 것이 두려워 당시 영문 주사였던 박영식에게 책을 넘겼고, 박은 이 책을 찢어서 자기 방 벽지로 발랐다. 그는 평소 벽에 있는 성경을 자연스럽게 읽으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집은 훗날 평양 대부흥의 근원지인 「장대현교회」가 되었다. 데이비스는 어떤가. 경남 땅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조차 없었던 그의 죽음은, 당시 풍토병이 창궐하고 선교사들 대부분이 건강을 잃게 되는 상황에서도 해방 전까지 호주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 조선 땅을 자원하는 동기가 되었고, 이곳에서 목숨을 건 선교로 경남을 변화시켰다. 저들은 의사로서, 간호사로서, 교육자로서 당시 문맹국이자 지구촌 최빈국이었던 이 땅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헌신했다. 그 열매가 오늘날 우리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토마스 선교사가 없었으면 존 로스 선교사가 없었다. 존 로스가 없었으면 월푸 선교사의 편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데이비스 선교사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들의 헌신을 통해 쓰러져가던 조선을 사랑하시어 자기 계획대로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시고, 조선을 구원해 내신 것이다. 하나님 구원의 계획에 경남이 중심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포함되어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4. 경남의 초기 미국, 캐나다 선교사들 활동 데이비스 선교사가 경남에 도착하기 전 이미 부산에는 캐나다 출신 게일 선교사가 있었다. 그리고 호주가 2차 선교사를 파송하는 시점까지 미국 북 장로교회가 파송한 베어드 선교사 등 3명의 선교사가 합류한다. 그러나 95년 이후 경남이 호주 선교사의 독점 무대가 되었다. 호주 선교사 이외 경남지역에 파송되었던 이 시기의 캐나다와 미국 선교사들을 정리해 본다. 1). 게일 선교사(J, S Gale) 데이비스의 마지막을 돌봐주었던 선교사다. 게일은 1888년 12월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YMCA 선교사로 내한하여 황해도 해주와 경상도 순회 선교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일에 대한 경남의 선교활동은 남아 있는 자료가 별로 없지만, 그는 1889년 7월 부산에 도착하였고, 90년 4월 4일 데이비스 선교사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반겨준 사람이며, 다음 날 임종까지 지켜보고 서울에 있던 데이비스의 누나에게 비보를 전해준 분이다. 게일은 토론토 대학의 지원이 여의치 못하자, 91년 8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로 이적했고, 92년 3월 14일 원산으로 옮겼다. 97년 미국 애리조나주 앨버니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99년 원산 선교부가 캐나다 선교부로 이첩됨에 따라 다시 서울로 이동하여. 1900년 연동교회 목사, 고종황제 고문으로 임명되는 등, 조선 왕실까지 활동을 넓혔다. 그는 선교사로서 활동보다 성경 번역과 문학 서적 번역(천로역정 한글 번역, 춘향전 구운몽 영역 등)에 더 알려진 분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남긴 학자이기도 하다. 94년에 쓴 「한국어 문법 형태」와 1909년에 쓴 「전환기의 한국」이란 책은 특히 유명하다. 서울에서는 언더우드와 함께 성경 번역에 주력했고, 후배 하디의 원산 부흥과 연이은 평양 부흥 운동을 측면 지원했으며, 한국 부흥 운동의 체계를 잡아 1909년 결성된 『백만인 구령 운동』 실행위원회의 의장을 맡을 만큼 당시 선교사 중 최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언더우드도 위원으로 활동) 게일은 구한말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감옥에 갇힌 이승만 이상재 등 청년들을 교도소에서 돌보며, 이들을 개종시켰고, 멘토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고종황제 고문으로서 이승만을 교도소에서 석방 시키고, 미국에 유학 보내면서, 워싱턴 총장에게 추천서까지 써 주었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뒷바라지했다. 그의 영향력은 대한민국의 건국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2). 하디(Robert. A, Hardie) 대학 선배인 게일의 부름을 받고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1890년 9월 30일 부산에 도착했다. 의사인 그는 파송 기관의 지원이 원활하지 못해 의사로서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자, 항만 의사로, 때로는 선박 검역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92년 11월 경남이 호주 선교부로 정해짐에 따라 게일을 따라 원산으로 옮겼고, 98년에는 미국 남 감리회로 이적했다. 게일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 출신인 이들은 부산에 2년여 체류했지만, 부산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하디는 원산에서 1903년 평양 대부흥의 시발이었던 원산 부흥 운동의 주역이 된다. 이후 하디는 다시 게일과 함께 서울로 옮겨 감리교 학교 『협성 신학』을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협성 신학은 당시 신학 교육뿐만 아니라, 민족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해 3.1운동 당시 33인 중 협성 신학 출신이 7명이나 나왔다. 3). 윌리엄 베어드(Willam.Martyne, Baird, 배위량) 1891년 10월 12일 호주 선교부가 2차로 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같은 시기에 미국 북 장로회가 베어드 선교사를 부산에 파송했다. 서울에 이어 평양(마펫 Samuel Moffett)과 부산에 지부 설치를 위해 파송한 것이다. 베어드는 91년 1월 29일 경남에 도착하였으나, 마땅한 거처가 없어 한성으로 갔다가 그해 9월 다시 부산에 내려와 부산 영사의 도움으로 주거지 건축을 시작해 11월에 정착했다. 이 무렵 호주 선교부는 2차 선교사 4명이 파송되었다. 이후 불과 4년여 동안 경남 지역과 전라도, 충청도까지 돌면서 순회 선교사로 활동하여 가는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1893년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 대구를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경상도가 남북으로 갈리기 전이어서, 밀양은 대구부 소속으로 하여 이후까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부산진 교회(92.4.15)를 시작으로 영주동 교회(지금의 초량교회) 양산 물금교회, 밀양 유천교회, 청도교회, 영천 초곡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부산진은 호주 선교부, 영주동은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의 활동 무대로, 두 지역이 당시 부산에서 가장 활발하게 성장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95년 이후 호주 선교부로 이양하고 대구로 떠났다.   베어드가 대구로 가기 전 1894년 4월 22일에는 호주 선교사 한옥에서 심상현, 이도년, 귀주 등 3명의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심상현은 호주 선교사 멘지스의 어학 선생이었고, 이 도년은 진 페리의 고아원 보모였다. 귀주는 호주 선교사들 가옥에 처음부터 드나들던 여자였다. (정확한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음) 당시 한국에 목사가 없었고, 호주의 앤드류 아담슨 목사가 도착하기 전(94년 5월 20일 도착)이어서 호주의 여 선교사의 요청으로 베어드가 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어드는 부산에 거주하는 4년 동안 소년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 경남이 호주 선교부로 넘어가면서 1895년 대구로 가서 대구지부를 설립하고, 처남이자 동료인 아담스 선교사에게 물려주었으며, 97년 평양으로 옮겨 『숭실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쓴다. 베어드는 이후 조선 교회 교육의 커리큘럼을 마련하는 등 교육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베어드가 세운 『숭실학교』는 평양 대부흥 운동의 산실이기도 했고, 이곳 출신자들이 3.1운동의 실무자로 3명이나 참여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2명이 들어있다. 4). 기타 선교사들 베어드에 이어 휴 브라운(Dr Hugh M, Brown) 부부가 1891년 12월에 도착했다. 의사인 브라운은 거처하는 자기 집에 시약소를 마련하고 사역했으나, 결핵에 걸려 2년 뒤 철수했다. 뒤이어 93년 11월에 의사인 어빈(Dr Charles h. lrvin) 선교사가 들어왔고, 그는 1911년까지 일하다가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 개인적인 일로 부산에서 활동했다. 어빈의 부산 선교 보고서에는 지난 8년 동안 6만 명의 환자가 치료받았고, 그중 9천 명이 어린아이였으며, 이 외에도 5,400번이나 왕진했다고 기록했다. 95년 5월 29일에는 베어드의 처남으로 아담스 부부가 내한하여 베어드를 도왔다.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지부 개척을 위해 97년 부산을 떠났고, 대구지부 결성과 함께 경북과 대구 지역 복음화에 이바지했다. 그가 한국에 올 때 데리고 온 생후 3개월 된 장남은 후에 아버지에 이어 2대 선교사로 일한 안두화 목사로 계명대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로스 목사 부부와 사이드보탐 선교사가 활동했으며, 이들은 부산지방 3번째 제일영도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한 분들이다. 또 스미스 목사 부부, 윈 선교사 등이 활동했으며, 스미스(심익순) 선교사는 김해, 거창, 창원, 합천, 함양, 함안 등에 교회 설립에 이바지 했다. 이후에도 밀즈(Dr Mills) 비거(Dr Biggar) 등 의사로 활동한 선교사가 파송됐다. 이들의 활동 영향으로 호주 선교부 최초의 의사인 휴 커를 선교사가 부산에 남지 않고 진주로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진주노회사 참조) 미국 북 장로교의 부산 선교부는 이 지역에서 함께 일한 호주 선교부와 부산, 경남 지역 선교사들이 정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북 장로교는 그 뒤 선교 지역 조정에 따라, 1914년에는 경남(부산)에서 병원 사역까지 완전히 철수하였는데, 이때까지 23년간(1891~1914) 21명의 선교사가 부산을 거쳐 갔다. (`이상규, 부산 지역 기독교 전래사` 참조) 다만 북 장로교의 선교활동은 의료선교 외에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고, 그들이 소유했던 가옥 등 재산은 1914년까지 호주 선교부로 이관되어 호주 선교부가 활동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5. 경남에 온 초기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들의 위상 경남은 1892년 이후 지역 분할 협정에 따라 호주 선교부 위주로 활동 무대가 되었지만, 이 무렵 경남에서 활동했던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의 게일과 하디, 그리고 베어드는 이후 국내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던 훌륭한 선교사들이다. 이들이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에 이어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주도했고, 이들이 세운 숭실학교, 협성 신학 등 교육기관은 조선 인재 양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선교사 세 분의 개인적인 능력 또한 탁월하여 한국 선교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게일은 원산 평양 부흥 운동에 이어 1909년 `금년에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건 『백만인 구령 운동』의 주체인 초대 실행위원회 의장을 맡을 만큼 국내 선교사 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경남 최초의 세례자에게 세례를 베풀었고(심상현 외 2인, 1894년), 호주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주거지를 준비하는 등 터전을 닦았고, 왕성한 현지 전도 여행으로 많은 교회가 태생할 수 있는 기초를 쌓았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미국 북 장로교회의 부름으로 서울에서 당시 조선 교회 교육의 커리큘럼을 만드는 등 교육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평양에서 설립한 숭실학교는 당시 민족 지도자 양성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최종편집: 2026-10-22 17: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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